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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자기소개서와 경력 증명, '이대리 노트'에서 답을 찾다

mindofwoodman 2026. 7. 17. 09:41

현대자동차는 2023년 11월 13일 울산공장에서 첫 전기차 전용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행사장 무대 뒤 대형 화면에는 손글씨와 숫자, 단면도와 화살표가 빼곡한 노트 한쪽이 크게 떠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 개발을 위해 1974년 이탈리아에 파견됐던 이충구 대리가 남긴 노트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AI(인공지능)와 로봇이 사람이 하던 업무의 일부를 맡기 시작했다. 현대오토에버의 생성형 AI 서비스 ‘H Chat’은 회의록을 정리하고 공지와 이메일 초안을 만든다. 개발자의 코드 검토와 단위 테스트 작성도 돕는다. 계열사인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도 현대차 생산 현장에서 실제 작업을 위한 현장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현대차그룹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석유화학·철강·가전·통신·유통 등 여러 업종에서 AI와 자동화 도입이 확대되는 가운데 희망퇴직과 사업 재편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의 2025년 국내 계열사 고용은 전년보다 1만 2375명 줄었다.

 

전동화 시대를 선포하는 무대에 등장한 반세기 전 ‘이대리 노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해야 할 때, 사람은 자신이 쌓아 온 숙련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 기대 수명이 길어지면서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뒤에도 계속 일해야 할 필요는 커졌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중장년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오랫동안 쌓아 온 경험을 몇 장의 경력기술서나 자기소개서로 압축하는 것이다.

 

반면 요즘 취업 준비생들은 생성형 AI를 활용해 입사 지원 서류를 작성한다. 진학사 캐치가 취업 준비생 1025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8%가 취업 준비 과정에서 AI를 사용했다. 가장 많이 활용한 분야는 자기소개서 초안 작성이었다.

 

하지만 아직 직장 경험이 많지 않은 취업 준비생에게는 ‘책임감’, ‘소통 능력’, ‘도전 정신’ 같은 몇 개의 단어 외에 자기소개서에 내세울 구체적인 사례가 많지 않다. AI는 그 단어들을 매끄러운 문장으로 늘려 준다. 다른 지원자도 비슷한 단어를 건네고 비슷한 문장을 받는다.

 

취업 준비생은 AI 덕분에 입사 지원 서류를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기업은 비슷해진 서류만으로 지원자를 가려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재직자들에게도 자신이 해 온 일과 경력을 정리해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년 전 사내 경력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참가자들에게 포트폴리오형 SNS(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고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보라고 했을 때, 대부분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몰라 첫 문장부터 막혔다.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이었고 근속 10년을 넘긴 중견 구성원들이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각종 서류를 정리하며 정해진 양식을 채우는 일에는 능숙했다. 글의 주제가 자기 자신으로 바뀌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강사가 참가자들에게 각자 참여했던 사내 프로젝트에서 무슨 일을 맡았는지 물으면, 대개 모두가 함께한 일이라며 자신의 역할을 따로 떼어 설명하지 못했다. 물론 회사의 성과는 공동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인의 기여와 성장을 설명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생산팀과 밤낮없이 조율해 견적 금액을 낮추고 납기를 앞당긴 일, 부하 직원들 사이의 갈등을 상사로서 중재하고 서로의 감정을 풀어 준 일도 모두 경력의 일부다. 결과만 적으면 사라지는 경험이지만, 과정을 남기면 자신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한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참가자들은 회사 일을 문서로 만드는 훈련을 오래 해 왔지만, 누구의 의견을 듣고 무엇을 조정했으며 자신의 판단을 왜 바꾸었는지를 자기 글로 정리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근속 연수가 짧은 젊은 직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창 시절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글로 정리할 기회는 이들에게도 많지 않았다.

 

사내 경력 개발 교육 뒤 자신의 경험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임직원이 늘었다.

 

현재 통용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으로는 직장 생활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기 어렵다. 직원에게 자신이 맡은 일과 그 과정에서 내린 판단을 평소 기록해 두라고 요구하는 회사도 드물다.

그러다 재취업을 앞두고서야 오래전 경험을 기억에서 꺼내 자기소개서에 넣으려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누구의 의견을 듣고 판단을 바꾸었는지, 10년 전 실패한 시도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까지 한꺼번에 되살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평소에 업무 기록을 쌓아 둘 필요가 있다. 나중에 필요한 내용을 골라 경력기술서나 자기소개서에 옮기기 쉽기 때문이다. 웹상의 기록을 뜻하는 ‘웹로그(weblog)’에서 이름이 나온 블로그는 일어난 일을 시간에 따라 쌓아 두기 좋은 SNS 중 하나다. 

 

업무 경험을 담은 글이 쌓이면 그 사람의 전문 분야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유튜브 채널의 영상 몇 편만 봐도 그 운영자가 어떤 분야를 꾸준히 다뤄 왔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기록은 채용 기업에도 유용하다. 경력직 지원자가 어떤 일을 오래 맡아 왔고, 문제를 어떻게 풀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면 기업도 몇 장의 입사 지원 서류와 짧은 면접에만 의존할 이유가 줄어든다.

 

반세기 전의 이대리 노트도 일을 하며 쌓인 기록이었다.

 

포니 개발이 시작된 1973년 무렵, 한국 자동차 산업은 외국 자동차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현대차는 독자 모델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해외 업체와 협업했고, 차체 설계를 맡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인 회사 이탈디자인 주지아로에 임직원을 파견했다. 이충구 대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74년 현지에 파견된 이들은 약 10개월 동안 자동차 설계와 시제품 제작 과정을 배우고 익혔다. 언어와 설계 방식이 낯선 만큼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도면과 그림을 따라 그리고, 현지에서 배운 내용을 수기로 남겼다.

 

이충구 대리가 보고 익힌 내용을 꼼꼼히 적은 기록은 ‘이대리 노트’로 불렸다. 귀국 뒤에는 현대차의 신차 개발과 기술 교육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

 

기술을 배우며 남긴 기록에서 산업사의 자료가 된 ‘이대리 노트’

 

이대리 노트는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포트폴리오가 아니었다. 당장 맡은 일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작성한 작업 노트였다. 무엇을 배웠는지뿐 아니라 낯선 언어와 설계 방식을 자신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그 안에 남았다.

 

기업이 자기소개서와 면접만으로 알기 어려운 지원자의 모습을 SNS에서 확인하려 한 것도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2010년대 초반부터 일부 기업은 입사 지원서에 블로그와 미니홈피, 트위터 등의 주소를 적게 하거나 지원자의 SNS를 채용 과정에서 살펴봤다. 

 

2011년 잡코리아와 『캠퍼스 잡앤조이』가 기업 인사담당자 372명을 조사한 결과, 55.1%가 지원자의 SNS를 방문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사생활이 담긴 개인 계정까지 채용 자료로 삼는 데 대한 반발도 이어졌다. 2024년에는 기업이 지원자에게 SNS 계정 정보를 입사 지원 서류에 적도록 요구하거나 입증자료로 수집하는 것을 제한하는 채용절차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일과 스스로 정리해 공개한 직무 기록을 살펴보는 일은 구별돼야 한다. 개인 계정과 직무용 계정을 분리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고 채용의 문이 좁아질수록 기업은 지원자를 더욱 면밀하게 검증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전문 분야와 업무 경험을 꾸준히 기록한 사람은 몇 장의 자기소개서만 제출한 사람보다 자신이 해 온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수월하다.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 기공식 화면에 등장한 이대리 노트는 이듬해 포니 공개 50주년을 기념해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테마전 「첫 번째 국민차, 포니」에 전시됐다. 당시 여든을 앞둔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도 전시장을 찾아 젊은 시절의 기록을 다시 보았다.

 

젊은 시절의 그가 훗날 박물관에 전시될 자료를 만들려고 노트를 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잘하려고 적었고, 귀국 뒤에는 동료들이 함께 보는 자료가 됐다.

 

반세기 전의 업무 기록이 회사의 개발 자료를 거쳐 산업의 역사로 남았다면, 오늘의 이대리 노트는 회사 이름이 적힌 업무수첩보다 직무용 SNS 계정에 가까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SNS를 이용하느냐보다 꾸준히 자신이 겪은 일과 판단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SNS(소셜미디어)에 쌓인 경험 기록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AI가 낮춘 문턱은 취업 준비생의 자기소개서 작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경험을 글로 기록하는 일도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나 역시 2012년부터 직무용 블로그를 운영해 왔다. 요즘은 업무를 진행하며 겪은 일을 AI에게 들려주고,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명하며 질문과 답을 이어간다. 돌아온 답을 읽고 빠진 맥락을 다시 보탠다. 대화 내용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해 달라고 요청한 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다듬어 블로그에 올린다.

 

2026년 초에는 명함 뒷면에 그동안 써 온 글이 쌓인 계정으로 이어지는 QR코드를 넣었다. 언젠가 AI 스마트글래스가 일상화되면 면접관이 지원자의 QR코드를 읽어 수년간 쌓인 직무 기록을 바로 살펴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 기록이 경력과 전문성을 충분히 보여준다면 면접관의 마지막 말은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가 아니라 “첫 출근은 언제 가능합니까”가 될지도 모른다.

 

AI는 남겨 둔 기록을 자기소개서로 바꿔 줄 수 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은 경험을 복원해 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