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아내가 새로 나온 노래라며 스마트폰을 차량 오디오에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허밍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싱그러운 기분이 들었다. 한낮의 더위가 미처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젊은 여성 가수가 부른 노래라고 생각했다. 멜로디는 쉽게 따라 흥얼거릴 만큼 단순했고, 가사는 밝고 부담 없었다.
두어 차례 반복 재생하며 다시 들었다. 독특한 음색과 매끄러운 가창력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비슷한 음색의 가수를 떠올릴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아내 스마트폰의 음악 재생 화면을 들여다봤다. 노래 제목은 〈마음의 숲〉, 아티스트명은 ‘조선힙합’이었다.
검색창을 열었다. 검색 결과를 훑어보니 AI 기반 창작 도구로 만든 음악이라는 내용이 간간이 보였다. 잠시 머리가 멍했다. 놀란 것은 AI가 노래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목소리를 어느 여가수의 음색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조금 전까지 아내에게 늘어놓은 칭찬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목소리라고 믿었던 감각이 검색 한 번에 흔들리는 경험은 낯설었다. 노래는 분명 마음에 들었는데, 그 목소리 뒤에서 누가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했는지는 재생 화면만으로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열릴 도자전 〈유용하고 무용하다〉에 놓을 고재 테이블과 좌대용 목재를 고르는 작업을 했다. 우리 회사에서 전시장 연출에 필요한 목재를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도자 작가들은 두 고전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했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앎에 이른다는 ‘격물치지’에서 유용을, 흙으로 그릇을 빚되 그 쓸모는 비어 있음에 있다는 노자의 문장에서 무용을 가져온 식이다.
고재 더미 앞에서 나무를 하나씩 살폈다. 판재의 가장자리에는 나무가 자라며 만든 굴곡이 남아 있었고, 표면에는 굵은 결 사이로 마르며 벌어진 틈이 오래된 지도처럼 이어져 있었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가구재와는 거리가 먼 나무였다. 도자기를 올려놓는 테이블로만 본다면 거칠고 불규칙했다. 그러나 도자기 곁에 놓였을 때, 그 굴곡과 틈은 흠이 아니라 전시의 일부가 됐다.
나무를 하나씩 고르는 동안, 전날 들은 〈마음의 숲〉의 허밍과 멜로디가 자꾸 귓가에 남았다. 그러자 퇴근길마다 지나치는 동네 실용음악학원과 보컬트레이닝교습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녁이면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그 문을 드나든다.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악기를 더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아이들일 것이다.
물론 그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음악을 만드는 AI에 나보다 훨씬 익숙할지 모른다. 그 훈련이 덜 중요해졌다는 뜻도 아니다. 고음을 안정적으로 내는 일, 현란한 손놀림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일은 여전히 값진 재주다. 다만 보컬과 반주, 편곡을 갖춘 한 곡을 실제로 부르거나 연주하지 않고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거나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창작의 문이 열린 셈이다.
장래 가수를 꿈꾸는 이들을 가르치는 방향도 달라질지 모른다. 무엇을 듣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 경험을 통해 세상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 고음을 안정적으로 내고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훈련만큼, 자기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일도 중요해질 것이다.

도자기를 받칠 고재를 고르며 전시 제목을 다시 읽었다. 그러자 요즘 전시 소개문과 기사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작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도자, 유리, 금속, 목공, 섬유, 자개를 다루는 사람에게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도공·목공·석공·철공이라는 이름은 원래 재료를 다루는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안에는 주문을 받아 필요한 물건을 정확히 만드는 일도, 숙련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도 함께 있었다. 산업화는 그중 반복 가능한 부분을 설비와 분업으로 옮겨왔다. 공장이 커질수록 손기술의 일부는 규격과 공정으로 대체됐다.
지금 AI와 로봇은 사무직과 전문직의 반복 업무에도 들어오고 있다. 보고서 초안을 쓰고, 번역하고, 자료를 분류하고, 고객 응대를 돕는다. 과거 공장이 손기술의 일부를 규격과 공정으로 옮겨갔다면, AI는 생각과 언어로 하던 일의 일부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가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란 단순히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삶과 노동에서 얻은 관점과 판단을 작업이나 글로 꺼내놓고, 그 결과물에 따라오는 질문에 자기 이름으로 답하는 사람이다. 그 이름은 자칭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업은 누군가에게 읽히거나 보이고, 평가받는다. 질문을 받고, 다른 해석을 만나고, 때로는 외면당하는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람은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도자 작품은 작가의 오랜 숙련의 정점 자체만으로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의 수준과 형태의 완성도가 사람을 압도한다. 그런데 책은 조금 다르다. 아무리 정교한 양장본이어도 책의 물성 자체가 작품의 가치를 완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북토크에서는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왜 이런 결말을 택했습니까", "왜 이 사람을 이렇게 바라봤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그 선택의 이유를 자기 언어로 설명할 작가 자신의 서사와 의도가 없다면, 그 자리는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AI로 만든 음악에도 이어진다. 누군가가 무슨 생각을 담아 가사를 썼는지, 왜 그 리듬과 악기를 택했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설명할 과정과 고민의 흔적마저 없다면, 가사와 앨범 이미지, 음악은 남아도 그 안에 자기 삶과 생각을 걸어둔 인간 창작자의 자리는 비어 있는 셈이다.

이 질문 앞에서 패트릭 브링리라는 작가가 생각난다. 20대 중반이던 브링리의 형은 몇 년간 암과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당시 《뉴요커》 행사부에서 일하던 브링리는 이전처럼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었다.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날 곳을 찾듯 메트의 경비원이 됐고, 그곳에서 10년을 보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돌기둥 한쪽에는 검게 닳은 자국이 남아 있다. 폴리에스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몸을 기대고 관람객을 지켜보며 남긴 흔적이다. 미술관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얼룩일 뿐이다. 그러나 경비원으로 그곳에 오래 서 있었던 브링리는 그 자국을 경비원들 사이에서는 ‘가드마크’라고 부른다고 알려준다.
그에게 미술관은 그림과 조각만 모인 곳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드나드는 하역장과 지하 통로, 작품을 지키는 경비원과 다른 직원들, 그림 앞에 잠시 멈췄다 지나가는 관람객까지 함께 쌓여 있는 공간이었다. 그에게는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들을 둘러싼 사람과 공간의 시간도 함께 보였다.
관람객에게는 몇 분이면 지나갈 그림 앞의 시간이 그에게는 며칠과 몇 주, 몇 달로 이어졌다. 브뤼헐의 〈수확하는 사람들〉 앞에 오래 섰고, 그림이 지루하면 사람을 보고 사람이 지루하면 다시 그림을 봤다. 작품과 관람객, 미술관의 일상과 자신의 생각을 자기 안에 쌓아갔다.
그가 관람객에게 읽어주는 것은 작품의 제작 연대와 양식만이 아니다. 경비원으로 그곳에 오래 서 있었기에 보인 관람객의 동선과 침묵, 미술관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경비원으로 보낸 10년의 이야기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이 됐다. 책이 나온 뒤 독자들은 경비원의 눈으로 본 미술관과 예술, 사람과 시간을 읽었다.
그는 이제 경비원이 아니다. 미술관과 도서관, 문학 행사에서 자신의 책과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주제로 강연하고, 메트에서는 개인 투어와 공개 투어를 진행한다. 2025년 봄에는 자신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색한 1인극에 직접 출연하며, 경비원 시절의 경험을 또 다른 형식으로 관객에게 건넸다.
경비 업무의 감시와 순찰도 언젠가는 AI 카메라, 출입 통제 시스템, 4족 보행 로봇이 나눠 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로봇이 브링리의 자리에 서서 같은 시간 동안 근무했다고 해서, 같은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는 25년 넘게 택배 일을 하며 쓴 기록을 바탕으로 딸과 함께 책을 낸 택배기사가 있다. 중국의 후안옌도 택배기사와 물류센터 야간직 등 여러 일을 거치며 쌓은 시간을 글로 남겨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를 냈다. 이들은 시간이 남아 글을 쓴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을 하며 쌓인 시선이 있었고, 그것을 남겼다.
택배기사도 작가가 될 수 있고, 경비원도 작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대기업 임원도, 스타트업 대표도 자기 언어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 직업의 높낮이가 갈림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기 노동의 시간을 무엇으로 남겼는지가 갈림길을 만든다.
브링리와 택배기사처럼 전문 작가나 언론인으로 출발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이 독자에게 닿는 통로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과거에는 일반인이 자기 삶에서 얻은 생각을 널리 드러내려면 신문사와 방송국, 출판사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지금은 SNS와 블로그, 뉴스레터와 글쓰기 플랫폼,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자기 이름으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이 변화는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온 기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에는 신문사와 방송국의 이름이 기자의 글을 독자에게 데려다주었다면, 이제 자기 서사와 관점을 가진 기자들은 뉴스레터와 팟캐스트, 유튜브 등 여러 채널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독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 개인도 기자도 자기 이름으로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통로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통로를 통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다.
그 통로에 올릴 글과 이미지, 음악을 만드는 데에도 AI라는 전에 없던 조수가 들어왔다. AI가 기사와 음악, 이미지의 초안을 만드는 시대에는 글을 잘 쓰는 기술만으로 자기 이름을 만들기 어려워지고, 글을 잘 쓰지 못하던 사람도 AI의 도움을 받아 자기 삶에서 건져낸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고 다시 고쳐볼 수 있게 됐다. 조선힙합이 AI로 노래를 만들었듯, 표현의 기술적 문턱은 더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채널과 도구가 늘었다고 해서, 하루의 경험이 저절로 글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하루를 살아낸다. 회의에서 오간 한마디, 고객과의 통화, 실수 뒤에 남은 찜찜함, 반복되는 업무에서 발견한 허점을 대부분은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순간에 잠시 멈춘다. ‘이 일은 한 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경험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남길 만한 질문과 의미를 알아차리는 눈이 필요하다.

일하면 경험은 쌓인다. 그러나 경험을 글감으로 바꾸는 눈은 글을 쓰며 자란다. 글을 쓰고, 쓴 글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는 자기가 무엇을 겪었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새로 보게 된다. 그때 경험은 단순한 사건이나 재직 기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된다. 이런 되짚음이 반복될수록 사회생활은 돈을 버는 노동만이 아니라, 미성숙한 사람이 어른으로 자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 이런 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을 배우고, 실수하고, 사람을 만나고, 반복되는 일을 견디며, 그 경험을 다시 글로 써보는 과정에서 자란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한 사람에게는 출퇴근 기록만 남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찰과 판단이 쌓인다. 청년과 저연차 직장인에게는 그 시간이 시작되는 첫 자리부터 좁아지고 있다.
이미 한국은행은 최근 3년간 청년층 일자리 감소분의 약 99%가 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에서 나왔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근거만으로 AI가 모든 감소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청년이 보고서를 쓰고, 자료를 찾고, 번역하고, 고객을 응대하며 일을 배워가던 자리부터 AI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신호로는 충분하다.
일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통째로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이미 현실의 순서를 거꾸로 읽는다. 신입이 하며 배우던 보고서 초안 작성, 자료 조사, 번역, 고객 응대 같은 업무부터 AI에 넘어가고 있다. 직무는 이미 잘게 쪼개지고 있고, 그 흐름 속에서 신입에게 허용되던 첫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다.
AI 도입은 더 이상 먼 미래의 기술 실험이 아니다. 직무의 일부가 AI로 넘어갈수록, 직장인은 회사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그 경험을 회사 밖에서 무엇으로 설명할지 더 이른 시기부터 고민해야 한다.

중소기업 임금근로자 가운데 부업을 하는 사람도 어느새 40만 명에 육박한다. 월급만으로는 불안을 감당하기 어려워 퇴근 뒤 다른 수입원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생계를 위한 N잡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회사에서 쌓은 지식과 판단이 다음 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경험은 플랫폼의 주문 단위로 흩어진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경력의 단절이고, 그 노동을 본업으로 해온 사람들에게는 경쟁의 압박이 된다. 그래서 직장인은 회사 안에서 어떤 일을 해왔고 무엇을 배웠는지를 회사 밖에서도 읽히게 남길 필요가 더 커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회사명과 부서, 직급과 직무를 통해 자신을 소개해 왔다. 주고받은 명함에는 그 사람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어떤 부서에 소속돼,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가 적혀 있다. 그 타이틀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일하고 노력해 얻은 이름이기도 했다. 다만 회사의 이름과 직함을 빌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소개였다.
직장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에 맞는 보수를 받는 곳이다. 동시에 사람과 문제를 만나고, 판단과 실패를 겪으며 자기 일을 배워가는 현장이기도 하다. 회사가 개인에게 일할 자리와 배움의 환경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문제를 오래 생각했는지까지 대신 말해주지는 않는다.

회사에서 받은 만큼 일하는 것은 노동자로서의 몫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며 얻은 관찰과 판단을 자기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그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이 겪은 일을 읽고 그 의미를 남기는 일은, 재직 기간을 자기 삶의 기록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로를 고르는 청년의 시야는 몇 개의 대학과 몇 개의 대기업 이름에 쏠리기 쉽다. 공공 직업정보에는 업무와 자격, 전망이 적혀 있고, 채용공고에는 급여와 근무시간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회사의 어느 부서에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일이 어떤 판단과 기술을 요구하는지, 어떤 실수와 보람을 남기는지는 좀처럼 알기 어렵다. 직업의 조건은 알려져 있어도, 그 일을 살아본 사람의 시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그 일을 살아낸 사람의 기록이 필요하다. 브링리의 회고록이 경비 업무의 시간과 미술관의 뒤편을 보여주고, 택배기사의 글이 배송 건수와 근무조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감각을 전하듯이 말이다. 자기 업에서 겪은 일과 거기서 얻은 판단을 에세이로 남기는 ‘업(業)세이’는 개인의 자기소개를 넘어, 아직 그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일의 안쪽을 보여주는 지도다. 선경험자들의 이런 기록이 쌓일수록 청년은 간판만 보고 진로를 고르는 대신, 자기에게 맞을 일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인사동 전시의 제목인 〈유용하고 무용하다〉를 다시 생각해본다. 유용함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회사 안에서 유용했던 사무직의 기능도 AI에 흡수되면, 그 일을 맡던 사람은 어느 순간 노동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 그전까지 개인의 역량으로 인정받던 일이 누구나 쓸 수 있는 AI 서비스가 해내는 일이 되면, 회사 안이든 밖이든 그 사람이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남들의 눈에는 그저 공간을 지키는 일처럼 보였던 경비원의 시간은, 오래 보고 생각하고 기록하면서 다른 의미를 얻었다. 출퇴근 기록부에는 근무 시간만 남았겠지만, 브링리는 그 시간에 쌓인 관찰과 사유를 책으로 남겼다. 독자들은 그 책을 읽고 그를 작가로 불렀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릇의 쓰임은 그 안의 비어 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 쓰임이 생기지만, 사람은 자기 안을 무엇으로 채워왔는가에 따라 사회인으로서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직장인의 삶에도 회사의 직함과 업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칸이 있다. 관찰하고, 읽고,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적으며 한 사람 안에 쌓여온 경험과 생각이 그 빈칸을 채운다. 명함이나 이력서의 칸에 모두 적을 수는 없고, 출퇴근 기록부에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회사원이라는 역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사회인의 정체성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만든다.
그 경험과 생각을 자기 언어로 남기는 일은, 자기 일과 그 일이 자신에게 남긴 의미를 해설하는 작가의 일이 된다. 그렇게 쌓인 기록은 회사 밖에서 자신을 다시 소개할 때, 이전 회사의 직함보다 먼저 꺼내놓을 수 있는 진짜 자기소개서가 된다.
명함에는 회사가 맡긴 역할이 적혀 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명함을 주고받으며 안면을 익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명함이 사라진 뒤, 사회는 다시 물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woodman📒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 시대 자기소개서와 경력 증명, '이대리 노트'에서 답을 찾다 (1) | 2026.07.17 |
|---|---|
| 신입 채용은 줄고 경력직만 찾는 시대, 청년은 어디서 첫 경력을 쌓나 (0) | 2026.07.13 |
| 제국이 베어간 미얀마 티크, 기후가 그 빚을 묻고 있다 (1) | 2026.06.25 |
| 왜 그 나무들은 끝내 좋은 장작은 될 수 없었을까 (1) | 2026.06.20 |
| 일본 버블경제 30년이 한국 부동산PF에 던지는 질문 (1) | 2026.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