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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주식 투자자가 아니라 자기계발자가 되어야 산다

mindofwoodman 2026. 5. 26. 16:20

박탈감은 이제 우리 사회의 일상어가 됐다. 예전의 불평등은 통계 속에 있었다. 소득 5 분위, 자산 격차, 상위 1%, 중위소득 같은 말로 설명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은 숫자가 아니라 눈앞의 장면이 됐다.

 

아이의 학원비에서, 친구의 성과급에서, 동료의 주식 계좌에서, 또래의 집값에서, 병원비 영수증에서, 취업에 실패한 청년의 긴 공백에서 사람들은 격차를 본다. 멀리 있는 구조처럼 보이던 불평등이 이제는 매주 만나는 사람의 말과 표정, 카카오톡 대화와 뉴스 댓글 속에서 확인된다.

 

교육에서는 부모의 정보력과 자금력이 아이의 경쟁 경로를 가르고, 주거에서는 집을 가진 사람과 아직 집을 마련할 엄두도 내지 못한 사람의 삶이 멀어진다.

 

나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애초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못할까.

 

돈을 더 낸 사람이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는 놀이공원 유료 패스권을 막아달라는 호소 글이 올라온 일도 그런 장면이었다. 누군가는 소비자의 선택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돈으로 줄을 앞서 가는 현실에서 박탈감을 느꼈다.

 

대기업 성과급 소식도 비슷했다. 액수가 알려지자 댓글창에는 축하보다 허탈감이 먼저 번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업장이 있는 이른바 반도체 벨트 주변의 수입차 매장과 부동산에는 문의가 이어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큰 성과급이 누군가의 소비와 자산 계획으로 이어지는 사이, 중소기업 직원과 공무원, 자영업자와 협력업체 관계자들은 저마다 다른 말로 같은 박탈감을 드러냈다.

 

논란은 한 회사의 담장 안에 머물지 않았다. 중기중앙회는 삼성전자 노사협상 타결을 두고 “중소기업 근로자와 사업주의 마음은 무겁다”라고 논평했다. 농민단체는 반도체 공장을 위한 송전탑과 공업용수 문제를 제기했고, 한전 직원은 반도체 기업의 이익에 저렴한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도 기여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 논쟁을 불렀다. 한 회사의 성과급 논란은 AI 시대의 이익이 누구의 기여 위에서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돌아가는가를 묻는 장면이 됐다.

 

이쯤 되면 초박탈감 사회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초박탈감은 남보다 조금 덜 가진 감정이 아니다. 애초에 같은 출발선에 설 기회마저 없을지 모른다는 감각에 가깝다.

 

그런데 그 박탈감 위로 더 차가운 현실이 밀려오고 있다. AI와 로봇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작가의 책상, 법정에 제출되는 서면, 사무실의 초안, 공장의 생산라인으로 들어오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AI 챗봇을 활용한다고 밝히자 곧바로 대필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챗봇을, 우리말로 치면 ‘자기야’에 가까운 애칭으로 부르며 아이디어를 분석하게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작가는 직접 해명했다. 글을 AI로 쓰지는 않았고, 예비조사를 빠르게 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라고 했다.

 

영연방 문학계에서도 커먼웰스 단편문학상 지역 수상작을 두고 AI 작성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는 그 의혹을 쉽게 가려내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심사위원이 인간이 쓴 작품에 상을 줬는지, AI가 개입한 작품에 상을 줬는지, 출판사와 주최 측도 선뜻 단정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변호사를 구하지 못한 한 일반인이 AI를 이용해 고소장과 소장을 분석하고, 법리 구조를 검토하고, 서면을 작성해 민·형사 분쟁에서 이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AI는 상대방 서면의 날짜 오류와 계약서의 서명 누락 같은 부분까지 짚어냈다고 한다. AI가 변호사를 대체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법률 언어가 더 이상 전문가들만의 닫힌 영역으로 남기 어렵다는 신호로 읽기에는 충분하다.

 

문학에서는 창작자의 고유성이 의심받고, 법정에서는 전문가의 권위가 흔들린다. 그 변화는 글과 문서를 다루는 지식노동의 가장 낮은 계단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판례 검색, 서면 초안, 계약서 분석, 오류 확인, 비교표 작성 같은 일은 겉으로 보면 단순 업무다. 그러나 그 단순 업무는 신입 변호사와 회계사, 세무사, 컨설턴트가 자기 직업의 언어와 감각을 익히던 훈련장이었다. AI는 바로 그 낮은 계단부터 밟고 들어온다.

 

전문직 전체가 내일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전문직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인간은 더 높은 판단을 요구받지만, 정작 그 판단력을 키우던 반복 업무는 AI가 먼저 처리한다. 신입과 저연차가 일을 배우던 입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고용 지표도 이 흐름과 겹친다. 한국은행은 2022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청년층 일자리가 21만 1000개 줄었고, 그중 대부분이 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에서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같은 기간 50대 일자리는 늘었다. AI 확산의 초기 충격이 저연차와 청년층에 먼저 닿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동시장 입구의 한기도 짙어지고 있다. 지난 4월 기준 6개월 이상 구직 활동을 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 실업자는 10만 8000명으로 집계됐고, 장기 실업자의 절반 이상은 20·30대였다. 겉으로는 고용시장이 버티는 것처럼 보여도, 청년층은 입구에서 더 오래 멈춰 서고 있다.

 

이 변화는 사무실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AI 자율공장, 현대차그룹의 다크 팩토리 구상, LG전자의 지능형 자율공장, 포스코와 SK하이닉스의 스마트 제조 전략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생산 현장의 비용 구조와 인력 구조, 숙련의 방식까지 함께 바뀌고 있다.

1929년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된 미국 대공황 시기, 노동인구 네 명 중 한 명은 실업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늘 늦게 알아차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새 기술을 낡은 기준으로 먼저 판단한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물리 키보드 없이 이메일을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다. 배터리와 통신망과 가격을 걱정했다. 그 걱정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은 휴대전화의 결함을 보느라, 휴대전화가 생활 방식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AI도 지금 비슷한 위치에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끔 틀리는 글쓰기 도구로 본다. 문장이 어색하다, 엉뚱한 답을 한다, 보안이 불안하다, 우리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지적 역시 틀리지 않다. 그러나 변화의 본질은 AI가 완벽하냐가 아니라, 일을 시작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빈 화면 앞에서 시작했다. 이제는 AI가 초안과 요약, 비교표와 기획안, 코드와 고객 응대 문안을 먼저 내놓는다. 사람의 몫은 처음부터 쓰는 일에서, 고르고 고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일로 옮겨간다.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은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여전히 AI로 과제를 하면 부정행위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고, 회사는 신입에게 반복 업무를 시키며 키워왔다. 그런데 그 반복 업무가 AI로 넘어간 뒤, 어떻게 사람을 숙련자로 만들지 아직 답하지 못한다. AI는 이미 들어왔지만, 사람을 뽑고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은 아직 AI 이전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이 거대한 전환기에 기묘한 불일치가 보인다. AI가 일과 창작과 생산의 구조를 바꾼다는 뉴스 기사와 유튜브 영상은 쏟아지는데, 정작 많은 사람의 관심은 기술의 사용법보다 수혜 종목으로 먼저 쏠린다.

 

지난 몇 주 사이 주중 회식 자리, 주말 가족 모임, 운동 동호회 뒤풀이 자리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챗GPT를 업무에 어떻게 활용할지, 내 직무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지, AI 이후의 경쟁력을 어떻게 만들지 묻는 대화는 드물었다. 자리를 채운 것은 코스피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엔비디아, 로봇주와 반도체주 이야기였다. AI가 일과 삶을 다시 짜는 기술이라면, 주식은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었다.

 

AI를 공부하는 일은 불편하다. 내가 해오던 일이 어떻게 쪼개질 수 있는지, 내 직업의 어떤 부분이 AI 기능으로 대체될 수 있는지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식은 즉각적이다. 오르면 희망이 되고, 떨어지면 분노가 되며, 종목명은 대화가 된다.

 

박탈감은 그렇게 준비가 아니라 편승의 감정으로 바뀐다. 남과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는 감각은 어느 순간 “나도 저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바뀐다.

 

물론 경계가 늘 선명한 것은 아니다. AI를 익히면서 주식도 사는 사람이 있고, 조용히 업무 방식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 투자 자체를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 전체의 관심이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 기술이 만들어낸 가격의 움직임에 더 빨리 반응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AI 열풍을 허상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진짜 변화가 있기 때문에 버블도 생긴다. AI와 로봇 열풍을 바라보는 전망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파국을 경고하는 쪽도 있고, 새로운 수요와 일자리를 말하는 쪽도 있다. 결론은 다르지만, 모두가 거대한 재편을 말하고 있다.

 

기술 전환기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됐다.

 

1840년대 영국의 철도 광풍도 그랬다. 처음에는 미래 산업에 올라타는 투자처럼 보였다. 회사가 세워지고, 계획 노선이 발표되고, 돈이 몰렸다. 사람들은 철도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격은 믿음보다 빠르게 부풀었다. 열풍은 꺾였고, 많은 투자자는 손실을 봤다. 그렇다고 철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선로는 남았고, 철도는 이후 사회의 기본 인프라가 됐다.

 

닷컴 버블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돈이 몰렸고, 거품이 꺾이자 수많은 기업이 사라졌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라지지 않았다. 실패한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이름에 붙었던 과도한 가격이었다. 광섬유망 투자 역시 한때 과잉투자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 고속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 스트리밍과 클라우드 경제의 토대가 됐다.

 

버블이 꺼진다고 기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거품이 빠진 기술은 더 싸지고, 더 조용해지고, 더 넓게 퍼진다. 주가는 흔들리고, 일부 기업은 사라지고, 투자자들의 돈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자동화된 업무 방식과 로봇이 들어간 생산 현장은 그때부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일터의 표준으로 번질 수 있다. 닷컴 버블이 꺾인 뒤 인터넷이 생활의 배경이 되었듯, 때로는 버블의 끝이 기술의 진짜 확산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철도 버블 뒤에는 선로가 남았다. 닷컴 버블 뒤에는 인터넷망이 남았다. 그렇다면 AI 버블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철도는 사람과 물건을 더 빨리 이동시켰고, 인터넷은 사람과 정보를 더 넓게 연결했다. 그러나 AI와 로봇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하지 못하던 일을 가능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다. 글을 쓰고, 문서를 검토하고, 판단을 보조하고, 물건을 조립하는 일까지 그 안에 들어간다. 인프라가 남는 대신, 그 인프라는 더 적은 사람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닥친 현실은, 하루 한 끼를 위해 무료급식소 앞에 줄을 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초박탈감 이후의 세상은 이 지점에서 더 차가워진다. 과거의 취업 빙하기가 일자리 문이 좁아지는 문제였다면, AI와 로봇 이후의 한파는 그 문 뒤에 있던 일 자체가 줄어드는 문제일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계속 비교한다. 누가 더 좋은 회사에 다니는지, 누가 더 많은 성과급을 받는지, 누가 먼저 집을 샀는지 계속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생계의 압박이 그 위에 겹쳐질 수 있다. AI와 로봇이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남보다 덜 가졌다는 박탈감을 말할 여유보다 오늘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가 급선무가 될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절대적 생존이 문제가 되는 시대다.

 

역사는 이상할 만큼 냉정하다. 버블은 꺼졌지만 선로와 인터넷망은 남았고, 그 위에서 산업의 새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은 대개 피해자라기보다 투기 열풍에 올라탔던 사람들로 기록된다.

훗날 사람들은 지금 이 시기를 AI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로 부를지도 모른다. 로봇이 공장에 들어가고, AI가 사무실에서 초안을 대신 쓰고, 창작과 법률과 회계의 경계가 다시 그어진 시기로 회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환의 길목에서 많은 사람이 테마주에 매달린다. 본업은 따로 있지만 마치 증권사 트레이더처럼 하루 종일 주가창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올랐느냐가 대화의 중심이 된다.  

 

누군가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고, 누군가는 기술이 만들어낸 가격 상승분에 투자한다. 

 

버블이 꺼진 뒤, 역사는 가격 상승분에 거는 기대를 거의 매번 투기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