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생 열 명 중 여덟 명이 사교육을 받는다. 초등학생은 열 명 중 아홉 명에 가깝다.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9조 2천억 원이다. 한편 2023년 기준 아동·청소년 자살률은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12세에서 14세 사이 자살률은 2000년보다 다섯 배 가까이 뛰었고, 중고등학생의 스트레스 인지율은 42.3퍼센트였다. 최근 14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더 많이 투자하는데 더 많은 아이들이 무너진다. 문제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학교도 있고, 교실도 있고, 교사도 있다. 학원은 넘치고, 입시의 문법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한 아이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타인의 말과 공적 규칙을 배우고, 갈등을 견디며, 실패를 통과해 사회인으로 자라나는 훈련 과정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이 붕괴는 한 번에 오지 않았다.
한때 아이들은 골목에서 자랐다. 그곳이 안전하고 아름다운 공간만은 아니었다. 거칠었고, 불공평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집과 학교가 대신해주지 못한 관계의 훈련이 있었다.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섞였고, 동네 어른의 잔소리가 있었고, 싫어도 같은 골목에서 다음 날 다시 만나야 했다. 관계는 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세련된 교육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원형은 들어 있었다. 타인의 규칙 앞에서 자신을 조정하는 일, 억울해도 설명해야 하는 일, 힘의 차이가 있어도 함께 있어야 하는 일을 아이들은 몸으로 익혔다.

골목은 줄었다. 아이의 방과 후 시간은 학원으로 옮겨갔다. 같은 나이, 비슷한 성적, 비슷한 목표를 가진 아이들이 한 교실에 앉는다. 시험을 위한 경쟁은 선명해졌다. 사교육 참여율이 올라갈수록 입시 경쟁자 훈련은 강해졌다. 그러나 나이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법, 불편한 어른을 견디는 법, 싫은 상대와 관계를 끊지 않고 조정하는 법은 배우기 어려워졌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온라인은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고립됐다. 싫은 상대는 차단할 수 있고, 불편한 공간은 나갈 수 있으며, 알고리즘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계속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회사에는 차단할 수 없는 상사가 있고, 피할 수 없는 고객이 있으며, 함께 일해야 하는 동료가 있다.
코로나는 이 흐름을 급격히 밀어붙였다. 학교는 등교가 아니라 접속이 됐고, 아이들은 자기 방에서 수업을 듣고 자기 방에서 쉬었다. 학교는 다시 열렸지만 사라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싫은 친구와 모둠 과제를 하고, 선생님의 꾸중을 견디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부딪히며 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아이를 사회인으로 만드는 훈련 과정이었다.
학교가 아이를 붙잡아두는 힘도 약해졌다. 고등학교 학업중단율은 2020년 1.1퍼센트에서 2024년 2.1퍼센트로 올라갔다. 학교 밖으로 나가는 아이가 늘었다는 것은 단순한 출석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라는 공간이 더 이상 모든 아이에게 의미 있는 훈련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가정도 달라졌다. 부모의 사랑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해졌다. 저출산 시대의 아이는 가족 안에서 더 귀한 존재가 됐고, 부모는 아이의 실패를 지켜보기 어려워한다. 부모도 처음부터 학교와 사회를 불신하려 한 것은 아니다. 입시 경쟁은 더 촘촘해졌고, 사고의 책임은 더 크게 물어졌으며, 실패 한 번이 아이의 경로를 바꿀 수 있다는 불안이 커졌다.
그 불안은 어느 순간 보호를 넘어 대리전으로 바뀐다. 아이가 부딪혀야 할 갈등을 부모가 먼저 막고, 아이가 감당해야 할 불편함을 부모가 대신 항의한다. 그렇게 아이는 상처를 덜 받는 대신, 상처를 설명하고 견디고 조정하는 시간을 잃는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학교에 간다. 학교는 원래 아이가 가정 바깥의 규칙을 배우는 곳이다. 타인의 권위, 또래집단의 질서, 공적 공간의 규칙을 배우는 곳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충분히 조정되지 못한 충돌은 교실 안에서 다시 나타난다. 교사는 생활지도를 해야 하고, 학생은 타인의 규칙 앞에 서야 하며, 학부모는 그 장면을 불안하게 지켜본다.
교실 안의 풍경도 달라졌다. 2024학년도 지역교권보호위원회 개최 건수는 4,234건이었다. 전년보다 줄었지만 교육부는 교육활동 침해가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보호자가 교사의 정당한 교육활동에 반복적으로 간섭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예전의 학부모 개입이 입시와 담임 배정을 둘러싼 비공식 압력이었다면, 지금은 민원, 신고, 아동학대 고소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교사 개인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이가 가정 바깥의 규칙 앞에 서는 장면 자체가 분쟁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교사의 꾸중은 교육이 아니라 민원이 될 수 있고, 생활지도는 지도보다 책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면 학교는 아이를 단단하게 세우기보다, 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소풍과 수학여행을 둘러싼 논란도 같은 구조 위에 있다. 체험학습은 원래 교실 밖에서 타인과 함께 움직이는 훈련이었다. 낯선 장소에서 규칙을 지키고,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고,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며,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학교는 교육적 필요보다 사고 책임을 먼저 계산한다. 무사히 끝나면 당연한 일이 되고, 사고가 나면 교사와 학교가 책임의 전면에 선다.
학교 밖에서는 인공지능이 채용시장과 일의 방식을 바꾸고, 기업은 신입을 길러내기보다 이미 훈련된 사람을 찾는다. 입시 위주 교육의 효용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다. 그런데 학교 현장의 논쟁은 체험학습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머문다. 입시의 낡은 문법은 손대지 못하면서, 아이가 사회를 몸으로 배우는 활동은 책임 문제 앞에서 위축된다.
교사가 무서워서 못 가르치고, 부모가 불안해서 못 맡기면, 학교는 아이를 훈련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어른들의 분쟁 가능성이 잠복한 공간이 된다. 학생은 그 사이에서 불편한 훈련을 받지 못한다. 꾸중을 견디고, 규칙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설명하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감당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이 회사에 들어간다. 회사는 학교보다 더 냉정한 공간이다. 상사는 교사가 아니고, 회사는 부모에게 설명하는 기관이 아니다. 일을 못하면 지적을 받고, 실수하면 책임을 져야 하며, 불편한 사람과도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부모가 대신 감당했던 갈등이, 이제 일터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더 이상 예외적인 해프닝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중앙일보가 국내 100대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 40명 가운데 14명이 본인이나 동료가 직원 가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부서 이동, 급여, 휴가, 복장 규정까지 부모가 회사에 묻거나 요구한 사례가 나왔다. 최근에는 신입사원 어머니가 연봉계약서를 함께 보겠다며 회사를 찾아왔다는 사례, 사수에게 혼난 신입의 부모가 회사를 그만두게 하겠다고 나선 사례도 보도됐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찰된다. 미국 취업정보업체 조사에서는 Z세대 노동자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부모가 잠재 고용주나 채용담당자에게 대신 연락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학부모는 학교에서만 등판하지 않는다. 사회인이 된 자녀의 회사 앞에도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회사도 더 이상 신입을 천천히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다. 예전 회사에는 낮은 일부터 시키는 시간이 있었다. 신입은 회의록을 쓰고, 자료를 모으고, 전화를 돌리고, 보고서 초안을 고치며 조직의 언어를 배웠다. 하찮아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 안에서 어느 말이 보고가 되고, 어느 숫자가 책임이 되며, 어떤 실수가 조직 전체를 흔드는지 익혔다.
하찮아 보이는 일이었지만, 학생이 사회인으로 건너가는 낮은 계단들이었다. 지금 그 계단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문서 요약, 자료 정리, 고객 응대, 일정 조율, 단순 분석처럼 과거 신입이 하며 배우던 일이 인공지능 도구 안으로 들어간다.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효율화다. 그러나 사회 전체로 보면 신입이 조직의 언어와 사회의 문법을 서툴게 익힐 시간이 줄어드는 일이다.
회사가 신입을 키우는 공간에서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선별하는 공간으로 바뀌면, 노사관계의 언어도 달라진다.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은 사라져야 했다. 지금껏 그 말 아래 희생과 침묵을 요구했고, 개인의 삶을 회사에 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이 사라진 자리를 성숙한 계약의 언어가 채운 것은 아니었다. 정규직 중심의 오래된 고용 질서는 약해졌고, 비정규직과 외주 인력이 빈자리를 메우는 방식은 더 익숙해졌다. 업무는 잘게 쪼개져 밖으로 나갔고, 회사 안에서 사람을 오래 데리고 가르치는 시간도 함께 줄었다.
공채로 뽑은 신입을 연수시키는 일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었다. 학생을 조직인으로 다시 길러내는 재사회화 과정이었다. 공채가 줄고 경력직 채용이 늘어난다는 것은 기업이 그 재사회화의 시간과 비용을 더 이상 떠안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회사는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가. 신입은 어디까지 실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비어 있는 자리에서 신입은 비용이 되고, 교육은 부담이 되며, 실수는 리스크가 된다. 기업은 즉시 투입 가능한 사람을 원하고, 청년은 경력을 쌓을 첫자리를 찾지 못한다.
학교는 입시를 치르게 하지만 사회를 견디는 법을 충분히 훈련시키지 못한다. 가정은 아이를 보호하지만 타인의 규칙 앞에 세우는 일을 어려워한다. 회사는 인재를 원하지만 신입을 길러낼 시간은 줄이고 있다.
그 결과 사회화의 비용은 청년 개인에게 돌아간다. 2025년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1만 7천 명으로 역대 최대였다. 이들 다수는 한 번쯤 노동시장에 들어갔다가 다시 밀려난 사람들이다. 학교를 지나 회사 앞에 섰지만, 사회인이 되는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고, 회사는 그 훈련을 대신해 줄 여유를 잃었다.
아이를 보호하는 손은 많아졌지만, 아이를 사회 앞에 세우는 시간은 줄었다. 성인이 된 아이는 아직 훈련이 필요한데, 사회는 이미 훈련된 사람만 찾는다.
아이들은 이제 어디서 사회인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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