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임없이 통화하는 사람들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총격이 아니었다. 극 중 계속 울리는 전화와, 그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휴민트〉의 주인공은 적진에 들어간 요원이지만, 동시에 과장이다. 상사의 지시를 받고, 현장의 사정을 해석하고, 아랫사람에게 다시 일을 나눈다. 지시를 그대로 옮기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현장 판단만 앞세우면 조직을 흔드는 사람이 된다.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인 동시에, 그 명령이 현실에서 어떤 모양으로 바뀌는지 감당해야 하는 사람.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과장은 매 순간 판단을 이어간다.
과장은 위계상 직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간관리 기능이기도 하다. 정보를 모으고, 연결하고, 압축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말로 바꾸는 기능을 수행한다. 본사는 원칙을 말하고, 현장은 예외를 만난다. 상사는 보고를 요구하고, 대리는 지시를 기다린다. 과장은 그 사이에서 말을 조율하고 실행 방침을 잡는다. 현장의 말은 조직의 언어로, 조직의 말은 다시 현장의 행동으로 바뀐다.
〈휴민트〉가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여러 사람이 정보를 연결하는 조직이다. 현장의 말은 요원에게 가고, 요원의 판단은 과장에게 올라가며, 과장은 그 말을 다시 상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꿔 공유한다.
군사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해 온 팔란티어가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반대 방향의 조직이다. 정보는 사람의 입과 보고서를 차례로 거치기보다, 전장을 옮겨놓은 화면 위에서 먼저 연결된다. 현장, 장비, 시간, 장소, 위험 신호가 하나의 상황판에 올라오고, 사람은 그 화면에 제시된 선택지를 두고 판단한다.
둘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가능한 중간 단계를 줄이고,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 최적의 선택지를 얼마나 빨리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다. 정보는 위로 올라가는 동안 늦어지고 왜곡되며, 명령은 다시 실무선으로 내려오는 동안 눈앞의 현실과 어긋난다. 군사 조직이 줄이려는 것은 바로 그 시간과 오차다.
과장의 머릿속이 화면 위에 뜬다
팔란티어는 미국의 데이터 플랫폼 기업이다. 이름부터 낯설다. 사람들은 이제 챗GPT(ChatGPT)나 제미나이(Gemini), 클로드(Claude)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에는 익숙해졌지만, 팔란티어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팔란티어를 단순히 '군사용 AI 회사'라고 부르면 절반만 맞는 말이 된다.
먼저 전장을 보자. 전쟁터에서는 위성, 드론, 감청, 레이더 신호, 현장 보고가 서로 다른 속도로 쏟아진다. 어느 정보가 중요한지, 어떤 표적을 먼저 봐야 하는지, 어떤 명령이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지 빨리 가려내야 한다. 팔란티어가 만드는 것은 단순한 자료 묶음이 아니라, 흩어진 정보를 연결해 만든 작전 지도에 가깝다.
온톨로지라는 말은 어렵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사람이 연결하던 것을 기계가 먼저 연결해 놓는 지도다. 표만 보면 사람, 차량, 장소가 따로 놓여 있다. 온톨로지는 그 사이에 선을 긋는다. 이 사람이 이 차량을 탔고, 그 차량이 이 항구에 갔고, 그 항구에서 과거에도 비슷한 접선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하나의 작전 상황이 된다.
영화 〈휴민트〉 내용을 빗대면 조금 더 쉽다. 예컨대 정보원이 밤 10시에 항구로 향한다. 그 항구에는 어제 북한 인물을 태웠던 차량이 먼저 도착해 있다. 그 차량은 범죄조직 연락책과도 연결돼 있다. 과장은 이런 조각을 머릿속에서 맞춘다. 팔란티어식 시스템은 그 조각을 먼저 맞춘다. 지휘관은 연결된 상황을 보고 감시를 붙일지, 접촉을 미룰지, 현장 인력을 움직일지 고른다.
이 시스템에 문장을 쓰는 인공지능이 붙으면 데이터가 사람의 말로 정리된다. 시스템이 '항구 위험도 높음'이라는 메시지를 띄운다면, 인공지능은 '정보원의 이동 시간, 과거 접선 기록, 차량 이동 경로가 겹치므로 항구 감시를 우선해야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바꿔 지휘관에게 보고한다. 사람이 상부에 올리던 보고의 언어가 AI가 생성한 문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이 구조가 기업 현장으로 옮겨간다. 글을 쓰고 문서를 요약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에 “지금 공장 어디가 위험한가”, “어느 주문이 납기를 위협하고 있나”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공장 안팎의 사정이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원료가 들어왔고, 어느 설비가 멈췄고, 어떤 주문이 급한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업무 현장에 빗대면 생성형 인공지능은 문장을 만드는 쪽에 가깝고, 팔란티어의 온톨로지는 관계를 먼저 그려놓는 쪽에 가깝다. 인공지능은 상황을 설명하고 선택지를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어떤 주문이 어느 공장과 납기에 묶여 있는지는 먼저 운영 상황판 위에 관련 데이터가 놓여 있어야 한다.
전장의 데이터는 휴민트, 즉 인간 첩보원과 무인 정찰기, 감시 카메라, 레이더와 각종 센서에서 모여 작전 상황판으로 들어온다. 기업 현장의 데이터도 다르지 않다. 입출고 기록, 주문 정보, 수치제어 장비, 생산 설비에 달린 센서, 품질 검사 결과, 창고와 물류 시스템의 정보가 운영 상황판으로 모인다. 전장에서는 표적과 병력과 지형을 연결하고, 공장에서는 원료와 설비와 주문과 납기를 연결한다.
전장의 작전판이 공장의 상황판이 된다
팔란티어의 국방·안보용 소프트웨어 고담이 전장의 작전판이라면, 기업용 소프트웨어 파운드리는 회사의 상황판이다. 전장만 작전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같은 대기업 제조현장은 공장이라기보다 하나의 산업 도시처럼 움직인다. 강재와 엔진, 도크와 크레인, 협력업체와 작업자, 납기와 품질 문제가 동시에 얽힌다. 전장에서는 표적과 병력과 지형이 흩어져 있고, 조선소에서는 자재와 설비와 사람이 흩어져 있다. 목적은 다르지만, 흩어진 현장을 빠르게 읽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파운드리가 하는 일은 그 흩어진 요소들을 하나의 관계망 위에 올리는 것이다. 공장, 장비, 제품, 주문, 재고, 납기, 클레임이 연결되면 어느 설비가 멈출 가능성이 높은지, 어느 주문이 납기를 위협하는지, 어느 원료가 품질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시스템이 먼저 보여준다. 예전에는 과장과 대리가 하루 종일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확인하던 질문들이다. 하지만 통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생산량, 설비 상태, 원료 사정, 납기 조건은 계속 바뀐다.
국내 주요 기업들도 이미 이 흐름에 올라탔다. HD현대는 팔란티어와 전사적 소프트웨어 공급계약을 맺었고, KT와 LG CNS는 팔란티어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코오롱베니트는 스마트팩토리 분야에서 파운드리 활용을 추진했고, LIG넥스원은 국방 분야에서 팔란티어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서로 다른 산업이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다. 흩어진 현장을 얼마나 빨리 하나의 통합된 시야 안에 놓을 수 있는가.
한국 기업들이 이런 시스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AI 유행 때문만은 아니다. 해외 공장, 원료 공급망, 납기, 품질, 설비, 고객 주문이 시시각각 바뀌는 시대에는 사람이 회의실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기업은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고르고, 더 빨리 책임질 수 있는 통합된 시야와 지휘 체계를 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을 더 뽑아 천천히 가르치는 방식보다, 데이터를 먼저 연결해 빨리 판단하는 방식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경험은 일자리로 연결될까
정부는 청년에게 일경험을 더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기업은 같은 시간에 그 경험이 쌓이던 현장을 다시 설계하고 있다. 올해 1분기 구직·실업·쉬었음 등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20·30대 미취업 인구가 171만 명에 이른다는 수치가 이 정책의 배경에 놓여 있다. 정부는 청년뉴딜을 내놓고, 대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1만 명 규모의 직업훈련 프로그램과 공공·민간 일경험 기회 확대를 제시했다. 말하자면 회사 밖에 신입이 일을 배우기 시작할 입구를 다시 만들겠다는 시도다.
이 흐름과 정부 대책을 나란히 놓으면 이상한 장면이 보인다. 정부는 회사 밖의 입구를 늘리려 하고, 기업은 그 입구 앞의 내부 동선을 바꾸고 있다. 그러니 일경험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일자리로 이어지는 길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라면 공장을 생각해 보자. 라면은 더 이상 국내 장바구니 안에만 머무는 상품이 아니다. 2025년 라면 수출액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불닭볶음면은 중국과 미국의 온라인몰에서 팔리고, 신라면과 진라면은 현지 대형마트와 편의점 진열대에 오른다. 매운맛은 챌린지가 되고, 봉지라면은 한류 콘텐츠를 따라 이동한다.
K-라면은 세계로 가는데, K-일자리는 왜 따라오지 않는가
라면이 많이 팔린다고 한국 청년의 첫 일자리가 같은 속도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수요가 해외에서 커지면 기업은 공장을 시장 가까이 보낸다. 삼양식품은 중국 저장성 자싱에 첫 해외 생산기지를 짓고 있다. 완공되면 그곳에서만 불닭볶음면이 연간 최대 8억 4000만 개 만들어지고, 생산분은 중국 내수시장으로 향한다. 오뚜기는 미국 생산거점 구축을 추진한다. 농심은 모스크바에 러시아 법인을 세워 러시아와 CIS 시장을 겨냥한다.
이것은 수출이 늘면 국내 공장이 바빠지고 국내 채용이 늘어난다는 오래된 도식과 다르다. 이름은 K-라면인데, 일의 지도는 이미 여러 나라에 펼쳐져 있다. 자싱의 불닭, 미국 생산거점, 모스크바의 판매법인, 부산의 수출전용공장, 국내 연구소와 본사가 하나의 공급망으로 묶인다. K-라면은 세계화되지만, K-일자리는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입사할 자리도, 과장이 될 길도 좁아진다
여기에 팔란티어의 파운드리 시스템이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자. 달라지는 것은 로봇팔 몇 대가 아니다. 라면 공장은 이미 충분히 자동화되어 있다. 달라지는 것은 로봇팔보다, 공장을 읽는 사람의 자리다.
예전의 신입은 하루 생산량을 정리한 생산일보를 맞췄다. 품질팀 숫자와 생산팀 숫자가 왜 다른지 확인했고, 창고에 전화했고, 포장 불량이 어느 시간대에 몰렸는지 표로 다시 세었다. 하찮아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일을 하며 공장의 언어를 배웠다. 어느 숫자가 중요한지, 어느 부서의 말이 왜 어긋나는지, 어떤 말이 보고서에서 통하는지를.
창고 직원이 왜 같은 재고를 두고 다른 말을 하는지, 현장 반장의 한숨이 어떤 신호인지, 과장이 보고서에서 어떤 단어를 지우는지도 보았다. 낮은 일이었지만, 낮은 계단이었다.
파운드리가 들어오면 그 상황판은 먼저 완성된다. 밀가루 로트와 유탕기 온도, 포장기 알람, 해외 주문, 선적 일정, 클레임 가능성이 한 화면에 연결된다. 시스템은 어느 라인이 병목인지, 어느 주문이 납기를 위협하는지, 어떤 원료가 품질 위험을 키우는지 먼저 보여준다.
물론 화면이 상황을 연결한다고 해서 현실을 자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가 비어 있거나, 현장이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거나, 조직이 보기 좋은 숫자만 올리면 상황판도 오판한다.
예전 회의에서는 과장이 묻고 대리가 전화를 돌렸다. 원료는 들어왔는지, B라인은 왜 멈췄는지, 미국 서부향 물량은 선적 마감에 맞출 수 있는지 확인했다. 파운드리가 들어오면 회의실 화면에 먼저 뜬다. 오늘의 병목은 B라인 유탕기 오일 상태, 납기 위험은 미국 서부향 3차 출고분, 원료 리스크는 수분 편차가 큰 밀가루 로트.
이제 중간관리자인 과장은 자료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화면이 제시한 선택지가 현장에서 가능한지 검증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 화면 앞에서 판단을 검증하는 사람이 신입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화면 위 데이터는 정리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읽으려면 이미 공장의 업무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유탕기 온도가 왜 문제인지, 특정 밀가루 로트가 왜 불량률과 연결되는지, 미국향 주문 하나가 왜 야간 생산계획을 다시 짜게 만드는지 판단하려면 경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AI가 신입의 일을 대신하느냐가 아니다. 신입을 경력자로 만들어주던 낮은 계단이 사라지느냐다.
과장은 당장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먼저 사라지는 것은 과장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다.
정부는 일경험을 늘리려 한다.
그러나 기업은 그 경험을 쌓아가던 첫자리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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